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글쓰는 산다

11. J에게

 


다 하지 못한 말


© Savva, 출처 OGQ

 

얼마 전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을 곱씹어 보곤 해.

주로 내가 요즘 드는 생각들을 떠들고 너는 조용히 들어주었지. 그 와중에도 나는 내 이야기보다 네가 최근엔 어떤 생각을 하고, 어떤 일들을 경험했는지 궁금해서 내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네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내 이야기를 떠들어대며 두서없이 말들을 늘어놓았던 것 같아. 서울에 와서 출근을 하고,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상담을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익숙한 날들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이 종종 떠올라.

 

이제야 꼬박 일주일이 지났는데 꼭 저 먼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일처럼 아득한 건 왜일까.

커다란 나무들이 드리운 어두운 그늘 숲길을 걷다가 눈부신 햇살이 가득한 평야에 다다랐을 때 그 순간을 기억해.

그곳은 꼭 아주 오래전 깊은 우울의 늪을 허우적대다 한줄기 빛이 있는 터널 끝을 본 것 같은, 그때의 감각과 비슷하달까. 그 넓은 초원에 사슴 몇 마리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초록색 풀밭 멀리 하늘 높이 우뚝 솟아있는 산꼭대기를 바라볼 때 '에덴동산이 꼭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'라는 생각을 했어. 물론 그 자리에서도 크게 감탄하고 너무 좋다!!!를 여러 번 외쳤기에, 너도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고 있겠지만.

 

예전에 네가 출장을 와서 만난 날, 그날 무슨 이야기들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이거 하나만큼은 또렷이 남아. 그때 아마 내가 비폭력대화 수업을 듣고 있거나 막 마쳤을 때여서 "사람들이 말을 할 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한데,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정말 어떤 의도를 생각해 보지 않고 말했던 것 같은데 너는 어때?"라는 질문을 하자 "저는 항상 의도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 같아요."라는 대답을 했었지.

 

그 말이 마음에 콕 박혀서 한동안 의도를 가지고 말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어. 너는 신중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라 언제나 말을 꺼내기 전에 몇 초간 침묵하면서 어떤 단어를 입 밖에 꺼낼까 곰곰이 생각하곤 하지.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 몇 초간의 침묵을 느낄 때면 나와는 다른 침착함에 놀라곤 해. 나는 말이 꼭 휘발되어 날아가 버리면 그만인 사람처럼 머릿속에 뒤엉켜 있는 것들을 잡히는 대로 꺼내곤 하는데, 이번 만남에서 너에게 꺼냈던 그 말들을 나는 어떤 의도로 이야기했던 것인지, 너에겐 어떤 의미로 닿았을지 이제야 생각해 보게 돼. 그렇게 생각하니 미안해지고 말았어. 왜 좀 더 신중하게 주제를 선택하지 않은 것인지,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헛소리들로 날려버린 것은 아닌지, 왜 네 이야기를 더 들어주지 못했는지 같은 이유로.

 

나보다 동생이지만 어떤 때에는 언니 같고 어떤 때는 친구 같은 J야. 건강하게 여행하다 돌아오길 바라!

너의 여행이 신선한 변화를 줄 수 있기를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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